민수가 출근했을 때 재현은 노트를 덮었다. 적어둔 말을 읽으면 준비한 설명처럼 들릴 것 같았다.
“어제 네가 한 상담을 안 읽고 끼어들었어. 고객 말도 끝까지 안 들었고.”
민수는 가방을 내려놓았다.
“네 일만 늘렸지. 미안해.”
“고객한테 같은 말 다시 하게 한 게 제일 싫었어.”
“알아.”
“다음에 나한테 먼저 물어봐.”
재현은 그러겠다고 했다. 민수는 전원을 켰다. 사과가 끝났다는 신호 같았다. 재현은 자기 자리로 돌아왔지만, 오늘부터 조금은 달라질 거라는 기대가 남았다.
오전에는 민수에게 들어온 질문을 넘겨다보지 않았다. 후배가 애매한 반품 건을 물었을 때도 현재 담당이 누구인지부터 확인했다. 후배는 민수에게 묻고 와서 처리를 마쳤다. 재현에게 답을 설명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점심 전에 팀장이 다음 주 회의 명단을 돌렸다. 재현의 이름은 없었다. 어제 일에 대한 경고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점심을 미루고 팀장에게 갔다.
“어제 잘못한 건 고치겠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어려운 상담을 같이 판단하는 자리에서는 계속 빠지는 건가요?”
팀장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민수 씨가 맡아보는 중이잖아요.”
“제가 뭘 맡으면 됩니까?”
그제야 팀장이 재현을 봤다. 잠깐 생각한 뒤, 정리 중인 안내 문서와 교육 자료를 마저 해달라고 했다. 재현이 제대로 써놓으면 후배들이 일하기 편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다음에는요?”
팀장은 다음 주에 진행 상황을 보고 정하자고 했다. 재현은 더 묻지 못했다. 당장 다음 일이 없다는 말을 들을까 봐서였다.
자리에는 밀린 문의가 거의 없었다. HQU가 찾아놓은 이전 답변을 확인해 보내고 나니 빈 목록이 나타났다. 재현은 새로고침을 했다. 목록은 그대로였다.
오후에 민수가 깨진 조명 건의 경과를 알려주었다. 회수 확인이 끝나 환불 처리가 됐고 고객에게도 안내했다고 했다. 재현이 다시 연락할 필요는 없었다.
“고생했어.”
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재현이 뭔가 더 아는 척하지 않고 말을 끝냈다. 그렇다고 마음이 편해지지는 않았다.
퇴근 직전 팀장이 팀 메일로 짧은 성과표를 보냈다. 민수가 마무리한 상담은 늘었고, 재현이 마무리한 상담은 줄었다. 아래에는 담당 조정을 더 진행해도 되겠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재현은 자기가 받은 상담 목록을 열었다. 처음부터 자기에게 오지 않은 일들이 있었다. 줄어든 일을 잘 못해서 끝내지 못한 것처럼 읽힐까 봐 성과표를 다시 봤다. 어디에도 그렇게 직접 쓰여 있지는 않았다. 다만 그 표가 다음 결정을 밀고 있었다.
민수가 옆에서 가방 지퍼를 닫았다.
“너 아직 할 거 많아?”
재현은 열린 창들을 봤다. 고객에게 답할 일은 없었다.
“조금.”
민수가 먼저 나갔다. 재현은 팀장에게 메일을 썼다. 상담이 줄어든 이유에 담당 변경도 함께 적어달라고 했다. 민수가 잘 처리한 일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가, 그 문장은 지우지 않았다.
보내기 전에 한참 읽었다. 자신이 받고 싶은 일을 다른 사람이 받았다는 이유로 성과를 깎으려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었다. 그렇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이 숫자가 다음번에도 같은 뜻으로 쓰일 것 같았다.
그는 메일을 보냈다. 또 하나, 확대하려는 범위와 그 근거를 자기 부분에 한해 보여달라고 요청했다.
집에 돌아와 밥솥을 열었는데 밥이 없었다. 아침에 씻어놓기만 하고 취사를 누르지 않았다. 냉장고에서 달걀을 꺼내며 회사의 빈 목록을 떠올렸다. 일찍 왔는데 저녁은 오히려 늦어졌다.
다음 날 오후, 팀장이 보낸 자료가 도착했다. 재현은 성과표의 설명부터 찾았다. 그 옆에 ‘담당자 의견’이라는 칸이 있었다.
‘본인도 업무 부담 축소를 희망함.’
재현은 밑으로 더 내리지 않았다. 자신이 하지 않은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