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만요. 사진 찢어져요.”
서경이 다가가자 지선의 손이 멈췄다. 서경은 손목을 잡지 않고 테이프 옆의 종이를 눌렀다. 아까 붙인 데가 단단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아이가 돌아왔다고 확인되면 내릴게요. 다른 손님들한테 사정도 말하지 않을 거고요.”
지선은 테이프에서 손을 뗐다. 서경은 젖은 종이를 펴고 한 걸음 물러났다. 문은 그대로 열 수 있었다. 지선은 문고리 대신 전화기를 잡고 카운터로 돌아갔다.
“사진 더 있어요.”
서경도 카운터 안쪽으로 돌아왔다. 지선은 사진이 켜진 전화기를 카운터에 놓고 손가락을 화면 위에 댔다.
“이건 작년 봄이고요.”
지선이 다음 사진을 열었다. 식탁 앞에 앉은 도하가 노란 천 위에 펜을 대고 있었다. 한쪽 뺨에 파란 점이 찍혀 있었다.
“손에 묻은 걸로 얼굴을 만져서.” 지선이 화면을 조금 키웠다. “이날 한참 닦았어요.”
서경은 천 위의 고래를 봤다. 발이 두 개였다. 전단 사진과 이름표에는 세 개가 있었다.
“하나 더 그렸어요. 두 발로는 못 선다고.” 지선이 말했다. 서경이 고래 쪽을 보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지선은 주머니에서 이름표를 꺼내 사진 옆에 펼쳤다. 세 개의 선을 손가락으로 펴 보였다. “여기 빨간 건 나중에 꿰맨 거고요. 고래가 다쳤다가 나은 거라며 다른 실로 하지 말래요.”
서경은 조금 전 그 실이 걸렸을 때 지선이 손톱부터 빼내던 모습을 떠올렸다. 전단과 대조하느라 셌던 선들이 아이가 그린 발로 보였다.
“처음에는 여기, 배 쪽이었어요.” 지선이 사진의 빈 곳을 짚었다. “그런데 발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고래한테 왜 발이 있냐고 했더니, 물 밖에도 나와야 된대요.”
서경은 웃음이 조금 나올 뻔했다. 사진 속 도하가 펜을 꼭 쥐고 있는 손이 유리문 앞을 지나다니던 아이들 같았다. 펜이 아니라 천을 잡고 있는 다른 손에는 파란 점이 묻어 있었다.
“그래서 하나 더 그려 줬어요?”
“자기가 했어요. 제가 이쪽이 더 낫겠다고 해도 싫대요. 여기여야 한다고.” 지선이 셋째 발을 손톱으로 짚었다. “마르고 나서 가방 달아 줬더니, 그날은 집에서도 가방을 메고 다녔어요.”
서경은 이름표를 돌려줄 때 지선이 천의 무게를 받치던 손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주워서 들고 다니는 물건 같지는 않았다. 자기가 너무 빨리 손님을 의심한 것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그린 건 세탁하면 번질 수 있어요.” 서경이 말했다. 이름표를 코트에서 따로 꺼내 둔 이유를 설명하고 싶었다.
“알아요. 그래서 젖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
서경은 더 이상 실을 자르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선물은 고쳐야 할 부분까지 포함해 그 아이 것이었다. 지선은 그림을 한 번 더 펴 보이고,서경이 사진을 다 볼 때까지 전화기를 당기지 않았다.
“됐죠?” 지선은 보관표를 꺼내 사진 옆에 놓았다.
지선이 보관표를 더 가까이 밀었다. 서경은 받으려다 손을 멈췄다. 코트를 꺼내 주면, 엄마에게 말한 대로 일곱 시에 출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카운터 안쪽의 자기 전화기로 손을 돌렸다.
“도하는 지금 어디 있어요?”
“엄마가 보고 있어요. 제 엄마요. 외할머니.”
서경의 어깨에서 힘이 조금 풀렸다. 코트를 가지러 몸을 돌리는데 화면 속 도하의 얼굴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사진에는 앞니가 남아 있었다.
“그럼 외할머님한테 전화해 주실 수 있어요? 아이 목소리만 잠깐 들을게요.”
지선은 이름표를 주머니에 넣었다. 전화기를 들었지만 통화 화면으로 바꾸지 않았다. 사진이 뜬 전화기를 서경 쪽 카운터에 다시 밀어 놓았다.
서경은 카운터 구석의 가게 전화로 손을 뻗었다. “제 전화 쓰셔도 돼요. 번호만 눌러 주세요.”
수화기를 들어 지선 쪽 빈자리에 놓았다. 아이 목소리를 들으면 들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누가 옳은지 따지는 것보다 그것이 먼저 끝날 것 같았다.
지선은 수화기보다 받침대의 버튼을 봤다. “여기서 모르는 사람이 말 걸면 놀라요.”
“어머님이 먼저 얘기하시면 돼요. 저는 옆에서 듣기만 할게요.”
지선이 자기 전화기를 쥐었다. 서경은 들려 달라고 손을 내밀지 않았다. 두 전화기 사이에는 보관표가 놓여 있었다. 지선은 수화기를 들지 않고 자기 화면 속 도하를 조금 더 크게 만들었다.
발신음이 카운터 위로 새어 나왔다. 서경은 가게 수화기를 제자리에 놓았다. 소리가 끊긴 뒤에는 손님이 밀어 놓은 사진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현재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길을 내놓았는데,돌아온 것은 같은 사진이었다.
그때 서경의 전화기에 신고 담당자의 문자가 왔다. 손님이 아직 있는지, 아이를 직접 봤는지 묻고 있었다. 서경은 카운터 안쪽에 놓인 전화기를 집었다.
“아이 찾았다고 보내 주세요.” 지선이 말했다. “제가 엄마인 거 보셨잖아요.”
서경은 답장 칸에 엄마라고 하는 분이 가족사진을 보여 줬다고 적었다. 지선이 보관표를 서경 쪽으로 밀었다.
“아이가 괜찮다고도요.”
서경은 엄지를 멈췄다. 아이를 직접 봤는지 묻는 문장이 답장 칸 위에 남아 있었다.
“그건 못 보내요. 아이는 못 봤으니까.”
지선의 손이 보관표 위에 멎었다. “사진까지 보여 줬는데요.”
“전화만 연결해 주세요. 목소리를 들으면 들었다고 보낼게요.”
지선은 자기 전화기를 당겼다. “아빠한테 알려 주면, 그 목소리 듣고 간다고 할 거예요.”
“도하가 가고 싶다고 했어요?”
“집에 간대요. 나랑 있는 데도 집인데.”
지선은 사진 속 도하를 엄지로 가렸다가 손을 뗐다. “토요일마다 데려다주고, 다음에 언제 오나 그것만 기다려요. 그런데 이사를 간대요. 며칠만 더 같이 있으면 괜찮을 줄 알았어요.”
“토요일 전에 뭘 사 놓으면,” 지선이 말을 이었다. “그걸 좋아할까 생각하면서 며칠을 기다려요. 그런데 와서는 가방을 현관에 놓지도 않아요. 다시 가져가야 한다고.”
서경은 대답할 말을 찾았다. 엄마 병실에 가져갈 슬리퍼도 현관 봉투에 들어 있었다. 누가 필요하다고 한 것을 챙기는 일과, 자신이 준비한 것을 꼭 써 주길 바라는 마음이 잠깐 겹쳤다.
“만날 날은 다시 정하실 수 없어요?”
“그걸 지금 여기서 정할 수 있어요?” 지선이 물었다. 서경은 입을 다물었다. “이사하고 나면,정해도 못 올 수 있잖아요. 그때 못 온다고 하면 제가 뭘 해요.”
서경은 자기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달력을 대신 정할 수도,아이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 줄 수도 없었다. 지선은 전화기를 자기 쪽으로 당겼다. 사진 속 아이가 카운터 불빛에서 벗어났다.
“그래도 지금 목소리는 들을 수 있잖아요.”
지선은 손가락을 움직이지 않았다. 서경은 아이가 그림을 그린 날이 행복했을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그날이 행복했다는 사실로 오늘 어디에 있는지까지 알 수는 없었다.
서경은 아까 이름표 뒤에 적혀 있던 숫자들을 떠올렸다. “도하도 그 번호가 있는 건 알아요?”
“알아요. 오늘도 그걸 보여 줬어요. 그 번호로 걸면 된다고. 나도 아는데.”
지선이 사진을 닫았다. “지금은 전화 안 해요.”
서경은 손님이 아직 가게에 있으며 아이를 직접 보지 못했고 통화도 거절당했다고 덧붙여 보냈다. 지선이 보관표를 집었다.
지선은 서경이 전화기를 내려놓을 때까지 기다렸다. “저한테 물어보고 쓰신 거예요?”
“방금 말씀하신 것만 썼어요.”
“그렇게 말하면 제가 애를 숨긴 것 같잖아요.”
서경은 답장 창을 다시 열었다. 지선이 읽어 보겠다고 손을 내미는 줄 알고 화면을 돌리려다 멈췄다. 이름표 사진 밑에는 아이를 직접 보지 못했다는 자기 말이 있었다. 그 말을 괜찮다는 말로 바꿔 줄 수는 없었다.
“그러면 아이한테 연락해 주세요. 그건 다시 보낼게요.”
지선은 내밀었던 손을 거뒀다. “보냈다가 다시 보내면 되는 거죠,여기는.”
서경은 빈 봉투를 카운터 한쪽으로 옮겼다. 손님이 물건을 맡기고 돌아가던 때처럼 일의 순서를 설명할 수 없었다. 이미 신고했고,손님에게는 그 일이 자기 허락 없이 바꿀 수 없는 일처럼 들리는 모양이었다. 지선은 더 이상 수선하거나 확인할 것을 묻지 않았다. 작업실 쪽에서 젖은 코트의 소매 끝이 보였다.
“코트 주세요.”
꺼진 화면에 두 사람의 손이 비쳤다. 지선은 전화기를 케이스에 넣었다.
서경은 작업대 쪽을 봤다. 세탁을 시작했다고 한 말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코트를 가지러 돌아서려는데 지선이 먼저 카운터 옆으로 움직였다.
“제가 가져올게요.”
“어디까지 됐는지 볼게요. 시작했다면서요.”
지선이 봉에 걸린 바지들을 한쪽으로 밀었다. 벌어진 틈으로 코트의 어깨가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