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은 전화기를 든 채 통로 입구로 갔다. 지선이 앞을 차지하고 있었다. 비켜 지나가려면 몸을 바짝 붙여야 했다.
“코트는 제가 꺼내 드릴게요. 거기서 기다려 주세요.”
지선은 이미 옷걸이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금속 고리가 봉을 길게 긁었다. 소매를 작업대에 펼치자 처음 보았던 얼룩이 그대로 나왔다.
“어디까지 한 거예요?”
서경은 소매 아래의 흰 천을 봤다. 약품이 묻은 곳이 없었다. 솔도 컵 안에 꽂힌 그대로였다.
“아직 못 했어요.”
“시작했다면서요.”
안쪽에서 건조기 알림음이 났다. 수건이 한 번 더 뒤집히고 멎었다. 그동안 둘 사이를 채우던 낮은 소리가 없어졌다.
“주머니만 봤어요.” 서경이 말했다. “이름표가 나와서요.”
지선은 소매를 뒤집어 봤다. 안쪽 봉제선도 젖은 그대로였다. “소매부터 손보고 있다고 하셨잖아요.”
서경은 작업대의 솔을 옮겼다. 옷을 꺼내 줄 자리를 만들려던 동작인데,지선은 그 손을 봤다.
“이제 하시려고요?”
“아니요. 꺼내 드리려고요.”
서경은 솔을 내려놓고 그 손바닥을 펴 보였다. 무슨 말을 더해도 방금 하려던 일의 변명처럼 들릴 것 같았다. 지선이 작업대 옆에 놓인 천을 당겼다. 얼룩을 받친 천까지 깨끗했다. 서경도 그쪽을 봤다. 자기가 하지 않은 일은 손님이 만져 봐도 그대로였다.
“그래서 못 가져가게 한 거예요?”
“죄송해요. 코트 드릴게요.” 서경은 옷걸이에 손을 뻗었다.
지선이 먼저 옷걸이를 빼냈다. 서경의 손은 빈 채로 남았다. 지선은 작업대에 옷걸이를 놓고 코트를 팔에 걸쳤다. 젖은 소매가 아래로 내려왔다.
“그냥 가져갈게요.”
서경은 손을 거두고 통로에서 물러났다. 지선은 코트를 안고 카운터 쪽으로 나왔다. 더 기다려 달라고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기다리라고 하지 마세요. 이제 그 말 못 믿겠어요.”
“네.” 서경이 답했다. “비용은 안 받을게요.”
“돈 얘기를 한 게 아니잖아요.” 지선은 팔의 코트를 누르며 말했다. “다 된다고 해 놓고 뒤에서 사진 보내고.”
서경은 목소리를 낮췄다. “이름표가 나와서 놀랐어요. 그건 말씀드렸고요. 세탁했다는 말은 제가 잘못했어요.”
말을 끝내자 옷을 맡기기 전의 지선 얼굴이 떠올랐다. 먼저 확인하고 연락하겠다는 말에 코트를 놓았었다. 그때 자신이 지켰던 말부터 깨뜨린 셈이었다.
지선은 바로 돌아서지 않았다. “물건은 다 주신 거죠?”
서경은 통로에서 한 걸음 더 물러나 카운터의 빈 봉투를 벌려 보였다. 안에 남은 것은 없었다. 손님은 눈으로 보고도 봉투 아래를 한 번 더 봤다. 서경은 그 확인이 기분 나쁘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지선이 코트를 몸 쪽으로 붙이자 둘 사이에서 젖은 천 냄새가 났다.
“가야 해요. 문 열어 줘야 해서.”
“아이한테요?”
지선은 니트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표찰의 203이 손가락 아래로 흔들렸다.
“외할머님하고 있다고 하셨잖아요.”
“금방 가요.”
“도하는 안에서 못 열어요?”
지선이 서경을 봤다. “밖이 계단이에요. 잘 모르는 건물에서 혼자 나오면 위험하잖아요.”
서경은 전화기를 조금 더 단단히 잡았다. “혼자 있어요?”
지선의 손에서 열쇠가 서로 부딪혔다.
“잠깐이에요. 코트만 맡기고 가려고 했어요.”
“도하 전화기는요?”
“아직 그런 거 안 사 줬어요. 제 걸로 하면 돼요.”
“그럼 어머님 안 계신 동안에는요?”
지선은 열쇠를 든 손을 내렸다. “잠깐 나왔다잖아요.”
서경은 자기 전화기를 내려다봤다. 지선이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까지 도하는 이쪽으로 전화할 수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그 방의 전화기까지 본 것은 아니었다. 서경은 지금 들은 말과,그 말 때문에 머릿속에 그려지는 방을 구별하려고 지선을 다시 봤다.
“아빠한테 전화해 달라고 했다면서요.”
“내가 하면 돼요.”
“그럼 이름표는 왜 여기 있어요?”
지선은 코트를 다시 고쳐 안았다. “제가 뗐어요. 자꾸 그걸 내밀어서. 번호는 나도 안다고 했잖아요.”
서경은 노란 천이 들어 있던 봉투를 봤다. 지선이 말을 이었다.
“다시 달아 준다고 했어요. 좀 있다가.”
“물건은 줬잖아요.” 지선은 카운터 위 빈 봉투를 봤다. “가지고 가서 달아 준다고요.”
서경은 코트가 놓였던 작업대를 봤다. 아까는 손님 옷을 내주면 이 대화를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옷도 이름표도 손님에게 있었지만,도하가 누구와 있는지는 오히려 처음보다 더 알 수 없었다.
“그때도 달아 준다고 하신 거예요?”
지선은 이름표가 든 주머니를 눌렀다. “네. 실도 안 자르라고 했고요.”
서경은 자기가 가위를 꺼내려던 것을 떠올렸다. 그림이 상하지 않게 접는 손과,그 번호로 연락하지 못하게 이름표를 떼는 손이 같은 사람의 손이었다. 어느 쪽 하나를 못 본 것으로 할 수 없었다.
지선이 전화기를 보는 서경의 눈길을 따라왔다. 손님은 주머니에 있는 물건을 다시 요구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서경에게 남은 것을 보고 있었다.
서경은 카운터 안쪽으로 돌아갔다. 전화기 화면을 켜자 지선도 카운터 끝을 돌아 따라왔다.
“아까 사진 지워 주세요.”
“혼자 있으면 알려야 해요.”
“경찰한테요? 아빠한테 데려다주게요?”
지선은 열쇠를 코트 밑으로 넣고 빈손을 내밀었다. 서경이 한 걸음 뒤로 가자 접수대 모서리가 허벅지에 닿았다. 지선의 손이 전화기 가까이 왔다.
“이름표하고 열쇠요. 찍은 거 지워 주세요.”
서경은 팔을 접었다. 지선의 손끝이 전화기 대신 펼쳐 놓은 접수장을 눌렀다. 종이에 주름이 잡혔다.
서경은 전화기를 더 높이 들지 않았다. 손이 닿지 않는 쪽으로 옮기며 이름표 사진을 열었다. 노란 천만 찍힌 화면을 자기 쪽에서 조금 기울였다.
“얼굴은 안 찍었어요.”
지선의 손가락이 눌린 종이 위에서 움직였다. “그 번호로 연락할 수 있잖아요.”
“아이를 찾는 데 필요하니까 보낸 거예요.”
“그게 누구 번호인지는 알아요?” 지선이 물었다.
서경은 사진을 봤다. 전단과 같은 번호라는 것은 알았다. 지금 그 번호로 누가 대답할지까지 자신이 확인한 것은 아니었다. 전화기를 넘겨서 손님이 지울 수 있게 해 주는 일과,모르는 사실은 모른다고 말하는 일이 한꺼번에 닥쳐왔다.
“아버님이 전단에 적어 놓으신 번호하고 같아요. 제가 아는 건 그거예요.”
지선이 사진을 더 가까이 보려 했다. 서경은 화면을 돌려주지 않은 채 카운터 옆으로 반 발 옮겼다. 뒤꿈치가 모서리에 걸렸다. 지선의 손은 여전히 접수장에 있었고,출입문은 그 어깨 너머에 보였다.
“사진은 못 지워요.” 서경이 말했다.
지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눌린 접수장에 전화번호의 끝자리가 가려져 있었다.
“도하가 괜찮은지 직접 확인해야죠.”
“그러면 데려가잖아요.”
지선이 손을 뗐다. “다시 보내면 이사 가 버려요.”
서경은 사진첩 대신 신고 문자 창을 열었다. 지선이 코트를 고쳐 드는 동안 엄지로 글자를 눌렀다.
아이 혼자 있는 것 같습니다. 문을 열어 줘야 한다고 합니다. 밖에서 잠갔다고 해요. 지금 나가려고 합니다.
전송을 누르고 나서 마지막 문장 위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밖에서 잠갔다고. 서경이 직접 들은 말은 문을 열어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서경은 입력란을 다시 눌렀다. 실제로 잠갔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적으려다가 지선의 그림자가 화면 위로 겹치는 것을 봤다. 잘못 쓴 말을 손님에게 숨겨서 끝낼 수는 없었다.
“제가 지금 확인한 것만 다시 말할게요.” 서경이 말했다.
지선은 서경이 아니라 켜진 화면을 봤다. “제 말도 적어요? 전부?”
서경은 접수장 위의 주름을 봤다. 자기 말은 손님에게 거짓말이었고,방금 보낸 문자는 듣지 않은 말을 들은 것처럼 만들었다. 그 잘못을 빼고 지선의 말만 전하면 자기가 한 일을 설명할 수 없었다.
“제가 잘못 말한 것도요.”
지선의 시선이 처음으로 화면에서 서경 얼굴로 올라왔다. 서경은 그 틈에 전화기를 가슴 쪽으로 당겼다. 입력하던 손을 숨기려던 움직임과 닮아 있었지만,이번에는 전화를 걸어서라도 그 얘기를 해야 했다.
“또 보냈어요?”
지선이 화면을 보려고 몸을 기울였다. 서경은 대답 대신 전화기를 자기 쪽으로 돌렸다.
“도하 데리고 갈 거예요. 여기서 더 말 안 해요.”
지선이 돌아서자 젖은 소매가 서경의 손등을 스쳤다. 곧바로 서경의 전화기가 울렸다. 둘 다 멈췄다.
“경찰이에요?”
서경은 전화기를 든 채 숨을 들이마셨다. 지선은 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으로 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코트 아래로 흰 열쇠 표찰이 보였다.
서경은 유리 너머 분식집을 봤다. 불은 켜져 있었지만 미란 아주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카운터를 돌아 나오자 지선이 뒤를 봤다.
“또 못 가게 하려고요?”
서경은 지선 앞을 막는 대신 문손잡이를 잡아당겼다.